[경향신문] '은하영웅전설'이 생각나는 기사로군요.
역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의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역사는 아니지만, 과거의 역사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1987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위해 각목을 든 깡패들이 난입하여 창당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사건, 일명 용팔이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건을 통해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유추해 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는 바라면서 이 칼럼을 씁니다.
1987년 4월 전두환 정권 말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전두환 정권은 내각제 검토에서 대통령 간선제의 헌법을 유지하려는 4·13 호헌 조치를 결정합니다. 이에 전국적으로 빈번한 시위 등으로 정국은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국민들의 요구에 반하는 호헌을 결정한 전두환 정권의 강경한 대응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정통 야당의 회복을 기치로 민한당과 국민당 등 이른바 관제야당에 압도적 승리를 거둔 신한민주당 내부에서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의 분열 조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故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로 결성합니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중간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선명야당의 결성을 내세우는 신한민주당 내 김대중과 김영삼계가 통일민주당 창당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의 정당법에 따라 정당 창당에 필수적인 지구당 창당 작업이 진행되던 중 1987년 4월20일부터 4월24일까지 20여 개의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 행사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건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야당지도자들이 창당을 준비하자, 당시 신민당의 몇몇 의원들이 ‘전주파 보스’로 악명을 떨치던 김용남을 찾아가 신당 창당을 방해해달라고 부탁했고, 김용남은 부하 200여 명을 데리고 전국으로 흩어져 창당을 무산시켰습니다. 김두한 밑에도 있었던 깡패지만 지금은 완전히 손을 씻은 김용남씨의 말에 의하면 “그 일을 치르고 나면 나도 과거 김두한 처럼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라고 당시를 회고합니다. “변명 같지만, 그때는 애국심이었다. 단순하게 싸움만 알았던 내게 한 국회의원이 찾아와 ‘동지’라는 말을 쓰며 회유했다. ‘김 동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네. 분당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이야.’ 그 말을 들으니 마치 독립투사라도 된 듯 피가 끓어올랐고 곧바로 전국의 부하들을 끌어 모았다.”라고 얘기합니다. 이 사건은 전두환정권시절까지 묻혀있다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1993년 3월6일 이 사건의 배후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져 전모가 밝혀집니다.
1986년 10월경 전두환과 독대할 기회가 있었던 이택돈(사건 당시 신한민주당 사무총장)은 그 자리에서 이택돈에게 김영삼 고문 등 신한민주당 내 강경파의 정치행태를 비난하면서 이택돈에게 여당과의 대화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전두환은 이택돈에게 당시 안기부장 장세동과 만나볼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만난 두사람은 1987년 4월 김영삼 등이 신한민주당을 탈당하고 선명야당의 기치하에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려 하자 조직폭력배 이승완 등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창당을 방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택돈에 대해 장세동은 약 6억원의 필요 자금을 지원하고 이승완에 대한 신변보장을 약속하는 등 사실상 배후지원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이승완의 지시로 용팔이 등이 동원되어 사건은 일어납니다. 이승완씨는 이후에도 태권도협회 고문으로 있다가 태권도협회 선거폭력 동원으로 2003년 구속됩니다.
경찰은 지구당 창당대회가 끝난 25일 뒤늦게 수사에 착수,김용남씨(당시 37세·일명 용팔이)와 이선준씨(당시 45세·신민당 청년국 제1부장) 등이 일당 2만∼8만원을 주고 폭력배 1백여명을 동원한 사실을 밝혀냈다. 수배자 76명 가운데 65명이 자수 또는 검거됐으나 경찰은 검찰의 불구속 지휘에 따라 대부분 석방했다.
경찰은 88년 9월24일 김용남씨를 검거했다. 김씨에게 창당방해를 지시한 것으로 밝혀진 이용구씨(당시 55세·전 신민당 총무국 부국장)는 이미 3일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출국한 뒤였습니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은 이런 역사적 전례와 함께 제5공화국에서 안기부로 명칭을 바꾼 국가정보기관이 야당의 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한국 국가정보기관 나아가 한국정치의 부끄러운 역사적 치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20년전의 사건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냐하면 이번에 특수임무수행자회가 진보신당을 습격해서 테러한것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특수임무수행자회라고 하지만 닌텐도코리아에 영업권을 요구하는 등 실제 하는 일은 조직폭력배인 단체와 국민을 지키는 경찰이 아닌 고등학생을 수업중에 끌어내고 보수단체의 폭력에는 눈을 감아버린 경찰, 어디선가 많이 비슷한 일이라는 것이죠. 이번 진보신당 당사 테러에서 연행된 이 단체 사무총장 오씨는 지난 6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연 ‘합동위령제’를 주도한 인물이며,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안보특위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신고뒤 15분이 넘어서야 늦장대응한 경찰도 그렇고, 6월6일 시민들에게 폭행을 가한 이 단체의 조직원들 역시 풀려난 것 또한 의혹의 한 대목일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시절 전두환의 지시로 국민을 탄압했던 안기부의 장세동과 그들의 밑에서 이권을 챙기며 충실히 반대세력을 폭력으로 막으려 했던 용팔이를 비롯한 정치깡패들, 저에게는 경찰청장 어청수와 특수임무수행자회가 겹쳐보이는 것은 제 개인의 느낌일까요?
참고자료: [단독인터뷰] 전 조폭보스 김용남, ‘용팔이 사건’ 그 후 20년 : 브레이크뉴스 임은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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